시작은 제 전문분야도 아닌 보고서 한 건이었습니다. 2년 전 기획부서에 있을 때입니다.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분야의 검토 보고서를, 그것도 최고경영층이 납득할 수준으로 일주일 안에 내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막막했습니다. 그때 막 퍼지던 ChatGPT와 Gemini를 처음 켰습니다.
쉽진 않았어요. 할루시네이션도 있었고, 같은 문장을 반복하기도 했고요. 그대로 믿고 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묘했습니다. 같은 도구가 방향만 정확히 잡아주면 놀랄 만큼 빨리 일하더군요. 결국 문제는 ‘AI가 되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믿느냐’였어요. 처음부터 한 가지는 정해두었습니다. 뽑아내는 건 AI에게 맡기되, 틀리면 안 되는 건 사람이 끝까지 검증한다. 그 규율이 이후 제가 AI로 일하는 방식의 뼈대가 됐습니다.
첫 시험대는 이론이었어요. 원본을 찾으니 200페이지짜리 영어 책이더군요. 요약본이야 떠돌지만, 경영층 결정에 틀린 정보가 들어가면 안 되니 전체를 검증해야 했습니다.
- ChatGPT·Gemini
- 영어 원서 핵심·디테일 검토 · 일주일 데드라인, 200p
- 이종산업 사례
- 동일 현상 발생 여부 확인 · AI 1차 + 수기 검증
- 팀 교차검증
- 할루시네이션·반복 오류 필터링 · 전원 야근
예전 같으면 번역을 돌리고, 200페이지를 다 읽고, 다시 요약했겠죠. 며칠이 걸릴 일이었습니다. 이번엔 AI가 핵심과 디테일까지 한 번에 짚어줬어요. 그렇게 아낀 시간은 놀리지 않고, 틀리면 안 되는 대목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데 썼습니다. 보고서 써본 분들은 알 거예요. 이론 기반이 단단하면 보고서가 덜 흔들립니다. 믿을 바닥이 생기니까요.
AI가 빠르게 끌어와도 버릴 것을 고르는 건 사람이었어요.

이론만으로는 부족했어요. 다음은 다른 산업이었습니다. 같은 현상이 우리 바깥에서도 일어났는지 찾아봤죠. 가설은 단순했어요. 다른 산업에서 먼저 벌어진 일이면, 우리 산업에도 비슷한 압력이 온다. 사례를 모으는 일도 AI가 빠르게 해냈고, 보고서엔 ‘왜 지금 봐야 하는가’를 설명할 근거가 하나 더 생겼어요.
검증은 손으로 했어요. AI가 끌어온 사례와 수치를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구글과 네이버를 뒤져, 증권사 리포트와 연구소가 낸 보고서, 뉴스 원문을 직접 찾아 하나씩 맞춰봤어요. 출처가 안 잡히는 문장은 버렸습니다. 팀 전원이 야근한 것도 그래서였어요.
그 보고서는 떠들썩하게 풀리지 않았어요. 은밀하게 부사장 이상만 보도록 종이로 인쇄해 직접 전했습니다. 담당도 아닌 부서가 쓴 한 건이, 그렇게 윗선을 조용히 돌았어요.
그 일주일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배운 건 보고서 쓰는 법보다 검증 루프였어요. 시키고, 의심하고, 다시 시키고, 마지막 책임은 사람이 진다. 다음 해 클로드 코드를 만났을 때도 그 방식부터 떠올렸습니다. 처음엔 보고서 한 건을 거들던 도구였는데, 반복해서 시키고 확인하고 고치게 만드니 작은 팀이 하던 일의 일부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돌아보면 저는 AI를 잘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경계를 긋는 사람이었습니다. 200페이지를 짚는 건 AI에게 맡기고, 출처가 안 잡히는 문장을 버리는 건 일주일 내내 사람이 했으니까요. 그렇게 _y Tower가 시작됐습니다. 무엇을 짓고 무엇을 지웠는지는 다음 호에서 하나씩 적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