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 목록 № 005
다섯 번째 이야기 · 두 달을 하루로

AI에게 ‘판단’이 아니라 ‘지우기’를 시켰습니다

설계·평가·대외 업무로 이미 정신없던 개발팀 세 사람이, 특허팀에서 내려온 두 달짜리 1차 요약서 검토를 하루에 끝냈습니다. AI에게 침해 여부를 묻지 않은 게 비결이었어요.

글 · Ray2026.07읽기 4분

설계, 평가, 대외 업무까지 하느라 세 사람 다 손이 모자란 개발팀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특허팀에서 경쟁사 특허 수백 건을 검토해달라는 의뢰가 내려왔어요. 침해 소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1차로 가려내는 일, 원래 프로세스상 두 달이 잡혀 있던 단계입니다. 담당 업무도 아닌 데다 셋 다 특허 전문가도 아니었어요. AI에게 “이거 침해야, 아니야”를 물어보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됐습니다. 판단을 넘겼다가 틀리면 소송을 떠안는 건 회사니까요.

출발점은 법 원칙 하나였습니다. 구성요소 완비의 원칙. 경쟁사 청구항이 A·B·C·D인데 우리 제품에 D가 없으면 침해가 아닙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성립하지 않아요. 이게 AI에게 줄 명확한 ‘지우는 규칙’이 됐습니다. 처음엔 키워드로 걸러봤는데, “배터리”가 들어갔다고 다 우리 배터리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방법이 같은가, 목적이 같은가를 따로 물어 둘 다 통과할 때만 남겼습니다. 여기서 무관한 40%가 사라졌어요.

과정 · 역할 · 결과
1차 필터
방법·목적 이중 판정 · 무관 약 40% 제외
위험 분류
구성요소 매핑 · 고위험 약 5% 격리
사람 몫
세 사람 · 고위험군 확인, 2차 상세 검토로 분리 · 하루

남은 특허는 구성요소를 우리 제품과 하나씩 맞대봤습니다. 비침해부터 저·중·고위험까지 나누고 고위험 5%를 격리했어요.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1차 걸러내기예요. 청구항을 한 줄씩 정밀 대조하는 상세 검토는 그다음이고, 여전히 사람 몫입니다. 제가 제일 조심한 건 이거였어요. AI가 “이 구성요소는 명백히 다르다”고 잘못 지우면, 진짜 침해 특허가 1차에서 걸러진 40% 더미로 밀려 후속 검토 우선순위에서 빠집니다. 그래서 마지막 5%를 사람이 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안전장치였습니다.

AI는 지웠고, 판단은 사람이 쥐었습니다. 넘긴 게 아니라 나눈 거예요.

이번 일의 지렛대는 “AI가 특허를 판단해줬다”가 아니었습니다. AI가 40%를 치워준 덕에 세 사람의 집중력이 진짜 위험한 5%에 꽂혔습니다. 적어도 이번 경우엔, AI에게 정답을 묻는 것보다 “명백히 아닌 것”을 지우게 하는 쪽이 더 안전했어요. 제거는 규칙으로 되지만 판단은 넘기기 어렵더라고요. 그것도 “하나라도 빠지면 아웃”이라는 명확한 규칙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AI에게 정답을 묻지 않고 명백히 아닌 것부터 지우게 하는 이 분업이, 두 달짜리 검토를 하루로 줄였고 지금은 제 기본형입니다. 다른 일에도 그런 규칙이 있는지, 저도 아직 더 찾아보는 중이에요.

Ray
글쓴이 · Ray

양산화 개발 조직의 연구원. 소수의 사람이 요구사항의 홍수를 견디는 자리에서, AI를 검색 도구가 아니라 손발로 세워보는 중입니다. 잘된 것보다 안 된 것을, 결론보다 과정을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