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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이야기 · 버린 쪽을 다시 보다

AI가 버린 쪽을 다시 봤습니다

특허팀이 1차로 걸러준 목록을 그냥 믿지 못해서 데이터를 직접 받아 DB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검토를 끝내고 나니 신규 특허 열 건이 남았고 마지막엔 질문 하나가 남았어요.

글 · Ray2026.08읽기 6분

기업에서 특허를 다루는 일은 대부분 쓰는 일이 아니라 읽는 일입니다.

새 설비나 제품을 개발하면 남의 특허를 밟고 있지 않은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볼지 담당 부서와 정하고, 그 기술 영역의 특허를 뽑고, 그 목록이 현업으로 내려옵니다. 저희가 할 일은 요약서를 한 건씩 읽으면서 “이건 봐야 한다”와 “이건 안 봐도 된다”를 가르는 겁니다. 그러고 남은 것만 상세 검토로 넘깁니다. 남의 청구항을 한 줄씩 뜯어서 우리 제품과 맞대보는 작업이에요. № 005에서 적었던 그 일의 다음 회차 이야기입니다.

이번엔 특허팀이 1차로 내용을 확인해서 목록을 보내줬어요. 고마운 일인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 더블체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면 받은 목록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키프리스와 윕스에 API를 등록해 원 데이터를 받아오고 DB를 직접 지었어요. 당사 특허와 경쟁사 특허를 전부 올려놓고 언제든 맞대볼 수 있는 상태를 먼저 만든 겁니다. 검토를 시작하기 전에 이틀이 그렇게 갔습니다.

검토 흐름 세 국면 — 넓게 뽑은 목록, 손으로 전수 검토하는 좁은 목, 그리고 남은 것만 가는 상세 검토
병목은 판정이 아니라 건수에 있습니다.

여기서 방향이 갈렸습니다. 특허를 표에 놓고 한 건씩 읽으면 그냥 수백 건짜리 노동이에요. 대신 그래프로 연결했습니다. 어느 특허가 어느 특허를 인용하는지, 어떤 구성요소가 어디서 반복되는지, 당사와 경쟁사의 권리가 어디서 겹치고 어디가 비어 있는지. 표에서는 보이지 않던 게 그래프에서는 보이더라고요.

거기에 TRIZ를 얹었습니다. 수많은 특허를 뜯어보고 “발명은 결국 몇 가지 방식으로 모순을 푼다”를 정리해 놓은 오래된 방법론이에요. 원래는 새 발명을 할 때 쓰는 도구인데, 이미 나와 있는 특허가 어떤 모순을 어떻게 풀었는지 분류하는 자로도 쓸 수 있습니다. 그래프가 빈 자리를 보여주면 TRIZ가 그 자리를 어떻게 메울지 방향을 줍니다. 이때만 해도 이게 나중에 무슨 일을 낼지는 몰랐어요.

그다음이 본 작업이었습니다. 한 건씩 “봐야 한다”와 “안 봐도 된다”를 매겼어요. AI에게 먼저 매기게 하고, 팀 사람들도 따로 매기고, 둘을 맞대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를 하나 바꿨고 그게 이번 회차의 핵심이 됐습니다. AI가 “안 봐도 된다”고 버린 쪽과 “애매하다”고 남긴 쪽을 사람이 다시 봤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본 것을 또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봤어요.

왜 하필 버린 쪽이었냐면, 침해 판정의 규칙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남의 특허 청구항에 A·B·C·D 네 가지가 적혀 있으면, 우리 제품이 그 넷을 전부 갖고 있어야 침해입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원칙적으로 침해가 아니고요(빠진 하나가 사실상 같은 것으로 인정되는 예외는 따로 있습니다). 이걸 구성요소 완비의 원칙이라고 부릅니다.

뒤집어 보면 좀 무섭습니다. 넷 중 하나를 잘못 읽으면 결론이 통째로 뒤집힌다는 뜻이니까요. “안 봐도 된다”고 버린 더미에 잘못 버린 게 한 건 섞여 있으면, 그 한 건이 몇 년 뒤에 경고장이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통과시킨 쪽을 아무리 다시 봐도 그 건은 거기서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의 시간을 통과분이 아니라 탈락분에 몰았습니다.

한 더미를 AI가 가르고, 사람의 시선이 통과분이 아니라 탈락 더미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또 한 번 재검증하는 세 국면
검증 자원은 AI가 통과시킨 쪽이 아니라 버린 쪽으로 보냅니다.

AI가 버린 쪽을 집중적으로 다시 봤습니다. 통과시킨 쪽이 아니라.

구간 · AI가 붙는 자리 · 사람이 쥐는 자리
데이터 확보
API로 원 데이터 수집, DB 구축 · 도구가 전부
추출·노이즈 제거
AI 주도 · 가장 크게 먹히는 구간
1차 필요·불필요
AI 초벌 + 사람이 탈락분 재검증
클레임 차트
초안만 AI · 판정은 사람
침해 판단·대응
사람 전담 · 변리사와 법무의 자리
신규 특허 발굴
그래프와 TRIZ가 빈 자리를 짚어줌

여기까지가 원래 하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프와 TRIZ를 붙여놓으니 검토만 끝난 게 아니었어요. 비어 있는 자리가 그대로 보였고 거기서 신규 특허 제안이 열 건 가까이 나왔습니다. 특허팀도 여기에 동의했고 기존 인력이 함께 붙어서 팀이 요구하던 물량을 한 번에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침해를 피하려고 만든 지도가 권리를 세울 자리를 알려준 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 줄로 정리를 해봤는데, 마음이 좀 이상해졌어요. 검색은 API가 합니다. 정리는 DB가 하고요. 1차 판정은 AI가 하고 사람은 AI가 버린 것을 다시 봅니다. 새 아이디어는 그래프의 빈 자리에서 나오고 특허 출원서 초안까지 AI가 뽑아줍니다. 물론 그대로 내는 건 아니지만요.

그럼 특허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없어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번 일에서 특허팀 없이 굴러간 구간은 하나도 없었어요. 검증 범위를 정한 것도, 유효한 것만 남긴 것도, 최종 판단을 한 것도 그쪽입니다. 다만 그 역할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옮겨가는지는 꽤 분명해 보입니다. 찾고 정리하고 쓰는 쪽이 아니라, 무엇을 볼지 정하고 어디까지 권리로 만들지 설계하는 쪽이요.

이건 특허만의 얘기는 아닐 겁니다. 검토와 심사 성격의 일은 대체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옮겨간다고 봅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남 얘기처럼 쓰기는 어렵네요.

제 일은 판정을 대신 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어느 더미에 쓸지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잘못 버린 한 건은 몇 년 뒤 경고장으로 돌아오지만 통과분을 아무리 다시 봐도 거기서 나오지 않으니, 그 시간은 탈락 더미에 걸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특허 원문을 받아오는 건 공개된 데이터라 API로 얼마든지 가져와도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우리가 무엇을 왜 보고 있는지가 담긴 검토 목록은 대부분 대외비입니다. 그 목록을 외부 모델에 올리는 순간 다른 문제가 시작돼요. 판정은 로컬에서 도는 모델로 하는 게 맞고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Ray
글쓴이 · Ray

양산화 개발 조직의 연구원. 소수의 사람이 요구사항의 홍수를 견디는 자리에서, AI를 검색 도구가 아니라 손발로 세워보는 중입니다. 잘된 것보다 안 된 것을, 결론보다 과정을 적습니다.